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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Worship broadcastof Bundong church

등록일 : 2019.03.22   조회수 : 654   설교본문 : 요한일서3:13-24

목숨을 버리는 사랑

  오래전 뉴욕의 한 거리에서 풍선 장수가 풍선을 팔고 있었습니다. 장사가 안될 때면 그는 풍선을 하나씩 하늘로 날려 보내고는 했습니다. 풍선이 하늘로 떠오를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잠시 동안은 장사가 잘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매번 다른 색깔의 풍선을 날려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하얀색, 다음에는 빨간색, 그리고 노란색의 풍선을 날려 보냈습니다. 잠시 후 한 흑인 소년이 풍선 장수를 올려다보며 질문했습니다. “아저씨, 검은 풍선도 하늘로 날아갈 수 있나요?” 풍선 장수는 따뜻한 눈길로 어린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얘야, 풍선이 떠오르고 안 떠오르고는 색깔이 아니라 풍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거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소년은 자신의 피부색보다 자기 안에 무엇을 채우느냐가 중요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바꾸기로 결단하면 그 순간 이후로 행동이 변화되고 습관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됩니다. 무엇보다 한 사람 안에 복음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으로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인생은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오느냐가 결정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신 복된 소식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믿음이 풍성한 삶의 은혜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자나 차에 치어 죽게 될 순간에 그 사람을 구하고 그 자신은 죽었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신문이나 TV를 통하여 종종 접하게 됩니다. 실로 이들은 몸소 행함으로(18절) 참된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고전13:5) 오직 다른 사람의 유익이나 생명을 위해 희생하고 목숨까지 버리는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참된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온전한 참사랑이십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죄로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가야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한 참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14-15절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여 죽인 것처럼 지금도 세상이 미워하니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옛적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지금도 교회란 아벨을 미워하는 세상이란 가인이 있습니다” 사랑과 생명은 거의 동의로 취급됩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옮기는 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는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결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의 시초이고 시작이고 씨앗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빛과 어두움이나 생명과 사망처럼 피차 교체되어야 하는 것이고 배격되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살인은 간음과 우상숭배와 더불어 가장 큰 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살인죄는 세상에서도 사형에 해당됩니다. 하물며 영생은 더욱 얻을 수 없습니다. 영생이 살인하는 자에게 결코 머무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최고 표현입니다. 비록 사랑이 영생의 근거는 아닐지라도 형제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미움이 잠재적 살인이고 살인이 미움과 시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살인하는 자의 현재는 영생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인하는 자의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 차 있어서 영생을 소유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움에서 시작된 살인과 사랑으로 시작된 영생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상극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내 돈(錢)이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쓰고 가는 돈이 내 돈이라고 합니다. 칠십을 훨씬 넘긴 노인 한 분이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을 합니다.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돈을 벌게 했으면 그 돈을 쓸 시간도 주어야지요. 그 많은 돈 한 푼도 못써 보고 그냥 왔으니 억울해서 못 죽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돈쓸 시간을 주었지만 네가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그냥 무시해 버린 것 아니냐?” “돈 쓸 시간을 언제 주었는지요?” “세 번이나 알려 주었지만 너는 그냥 무시 하였느니라. 첫 번째는 너의 검은 머리카락이 흰 색으로 변했을 것인데 늙음의 시작인 줄 몰랐느냐? 두 번째는 너의 시력이 약해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을 텐데 죽음이 가까이 온 줄 몰랐느냐? 세 번째는 너의 체력이 달려서 일을 할 때 몹시 힘들었을 텐데 죽음이 방문 앞에서 있는 줄 몰랐느냐?” “말로 알려 주어야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행동으로 보여 주어도 돈에 눈이 어두워 모르고 지낸 너의 잘못이지 왜 나에게 원망하느냐?” “그 많은 돈 한 푼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아이구 억울해라!” 내 돈이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쓰고 가는 돈이 내 돈이라 합니다. 인간은 멍청해서 남긴 돈이 재산인 줄 압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믿음으로 감사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몸과 물질을 다하여 영혼구원에 최선을 다해야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물질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해야 진정한 청지기이며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여 원수를 형제와 성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반드시 모든 형제를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하나님과 천국을 모든 형제들에게 보여주는 목숨을 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하나님의 선수적사랑(initiative love) 때문에 사람은 사랑을 알게 되고 또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시한 말이 목숨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일상생활에서 형제의 궁핍을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에게는 없는 것이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말과 혀와 행함과 진실함을 동의어로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말과 혀가 같은 것처럼 행함은 곧 진실함입니다. 사실 말과 혀로 사랑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와 행동이 뒤따를 때에 사랑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말고 혀 보다 더 큰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하는 데 작거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문제이고 부족입니다. 실천 없는 사랑에서 실천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사랑의 질적 측면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본절에서 사랑의 실천을 선언함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의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생활이 어려운 형제를 보고도 그의 궁핍함을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과 혀에는 사랑의 행동이 있어야 하고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 유기 농업의 선구자였던 로데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연식품의 대단한 애호가였습니다. 가공식품을 멀리하고 자연식을 전파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사람들에게 자주 자신의 건강을 과시하곤 했습니다. 그는 일간지˂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72세인데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가 아니라면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 것이다.” 이렇게 호언장담했고 TV토크 쇼에도 나가 자신의 건강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방송 녹화가 끝난 직후에 그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비단 로데일 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오만은 하늘 끝까지 치솟고 있습니다. 문명과 의학에 대한 과신을 넘어 생명 복제를 통해 영생도 가능할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평생 양심적으로 살았고 선한 일을 했다고 하나님 앞에 가서 자랑하며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교만이요 하나님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하나님이 다른 죄는 손가락으로 다루시지만 교만은 팔을 걷어붙이고 다루신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은 하나님 기준에 맞춰 나를 볼 때 가능합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아는 데서 비롯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교만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말에 능력이 있고 위엄이 있습니다. 로마 격언에 “고통 없이 사랑하며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데에는 산모의 해산의 고통이 따르듯이 참된 사랑에도 고통이 수반됩니다. 우리를 박해하고 고통을 주는 원수들을 위해서도 눈물로 기도하고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5:44). 원수를 사랑하는 행함과 진실함이 진정 하나님의 사랑이며 원수를 감동시키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바로 이 사랑이 모자랍니다. 말과 혀의 사랑은 어디서나 넘쳐나는데 행함과 질실함이 부족합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없는 사랑은 울리는 꽹과리이고 아무 유익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13:1-3).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진정한 희생적 사랑입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겨운 사랑이 있었기에 성 어거스틴이 탄생할 수 있었듯이 우리들의 행함과 진실함이 넘치는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열매가 풍성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반복하여 믿으라 하셨고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요13:34). 이와 같이 위로 예수님을 믿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 계명의 요약이며 십자가의 도이며 성도의 본분입니다. 사랑은 계속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현재형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적인 하나의 계명입니다. 믿음은 사랑의 근거이며 사랑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본질인 뿌리와 같고 사랑은 현상인 열매와 같습니다. 모든 믿음은 오직 사랑으로만 증명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은 필수이며 상호보완적입니다. 본문에서 믿음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로 성령이 제시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주 안에, 주가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신다는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주 안에 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사랑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선물임을 뜻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각종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의롭게 행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심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종, 민족, 계급, 조건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여 만인에게 보편적이고 공평하게 부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사랑의 근원이며 극치이며 모범인 것입니다.

기원전 327년 늦은 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정복 후 인도로 진격할 때였습니다. 부대는 생각처럼 용맹스럽게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왜 이렇게 움직임이 둔해졌는지 고민하던 알렉산드로스의 눈에 수많은 전리품을 무겁게 실은 수레들이 보였습니다. 그날 새벽에 알렉산드로스는 자신과 측근들의 짐수레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군사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 노획물들 때문에 우리가 힘없이 행군하는 것이다!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탐욕을 버려라! 나와 함께 인도를 정복하러 가려 한다면 자기 수레를 불태워라!” 이 일을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자 병사 대부분이 환성을 올리며 짐수레를 손수 불태우거나 부숴 버렸다. 이런 일은 결행하기보다 계획하기가 더 위대하고 힘들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들을 보자 대왕은 열의와 자신감에 넘쳤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승리보다 당장의 유익이 더 중요합니까? 우리가 겨우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를 통해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승리를 보셨습니다. 그 승리는 치열한 영적 전투를 통해 획득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전쟁에 대해 잘 안다고 해서 전사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군인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것과 군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아무리 잘 안다고 하여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정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십니다. 서로 사랑할 때 계명이 되는 것이고 진정한 계명은 조건 없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능력과 구원과 용서와 천국과 면류관이 있습니다. 사랑은 말할 때가 아닌 행하고 순종할 때 사랑이 되고 능력이 되고 기적이 되고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계명대로 서로 사랑함으로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하고 열매를 맺는 진정한 성도와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세상은 시기와 질투와 싸움과 전쟁으로 가득 차 있고 피로 얼룩져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성도들이 형제를 사랑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계명대로 사랑하여 예수님처럼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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