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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Worship broadcastof Bundong church

등록일 : 2019.11.15   조회수 : 1,152   설교본문 : (시편 136 : 1 - 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어느 날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겨우 졸음에 목숨을 걸겠습니까?”라고 적힌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졸음운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문이었습니다. 잠깐 졸기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럴 의도가 없는데도 실제로 그런 결과를 유발하는 선택을 합니다. 잠이 부족해 피로가 극심한 상태로 운전을 하거나 음주 후 숙취가 남았는데도 운전대를 잡는 것입니다. 대리운전을 요청하거나 잠시 쉬면서 피곤을 풀지도 않고 반쯤 감긴 눈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좋은 의도만큼이나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신분인지 안다면 겨우 돈이나 사회적 성공과 쾌락에 목숨을 걸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 너머에 있는 더 가치 있는 것과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내 의도가 하나님 나라와 복음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공동체를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내 선택은 그 의도에 걸맞은 선택인가? 다시 말해 내 선택은 그 의도에 합당한 거룩함을 좇고 있는가? 재정∙관계∙시간 등 모든 면에서 내 선택은 내 의도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결국은 의도가 아니라 선택이 내 삶을 만듭니다. 거룩한 선택이 거룩한 삶을 만듭니다.    


  오늘 시편 136편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가 26번이나 반복됩니다. 어떤 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살전5:8). 감사를 알고 생각하는데서 감사를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라는 권면이나 선택이 아닌 절대 명령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해야 합니다. 다 알고 있지만 감사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범사에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비천한 가운데서도 기억해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본문 23절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바벨론에서 70년이나 학대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비천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비천(卑賤)은 지위나 신분이 낮고 천하다는 뜻입니다. 문자적인 뜻은 ‘낮은 토지에 있는 우리를 기억하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사 시대와 같이 그 숫자도 적고 분명한 민족성도 형성되지 않아 국가적 개념으로 볼 때 아주 유약한 상태에 있었던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지키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고통스럽고 유약한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던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비참한 자리로 떨어져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거기서 끌어내신 일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귀한 존재였습니다(창1:26-27). 그러나 타락한 이후로는 그 처지가 비참하게 되어 마치 멸망하는 짐승처럼 되어 버렸고(시49:12,20),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돼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벧후2:22). 파스칼은 명상록에 이런 비극성을 예리하게 기술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늘의 왕자들이 될 목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러운 시궁창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가련한 존재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런 추악한 자리에서 끌어내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두고서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한 여인이 잔뜩 근심 어린 얼굴로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어요. 새로운 삶을 살고 싶지만 늘 작심삼일이어서 새해에 세운 계획도 지금은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목사는 여인의 말을 듣고 창고로 가더니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은 낡은 소쿠리를 들고 나와 그 여인에게 건네며 말했습니다. "이유는 묻지 말고 여기에 물을 가득 담아 오시기 바랍니다." 구멍이 숭숭 난 소쿠리에 물을 담아 오라는 말에 여인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목사의 말을 따라 우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소쿠리에 물이 담길 리 없었고 여인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돌아와 목사에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쿠리를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쿠리에 물을 담지는 못했지만 소쿠리의 먼지는 깨끗이 사라졌지요? 마음먹은 대로는 안 되도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은 시작이고 반은 반이지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은 과장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속담 속에는 시작하기 전 어려운 결정에 대한 갈등과 고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작을 했다는 것 자체가 큰일을 해낸 것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전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시작은 거룩하고 경건한 시간입니다. 두려워 마시고 희망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미래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진 것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의 삶이 아닌 새로운 미래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아픔과 상처와 열등감과 비참함에서 건져 주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과 손을 내미는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의 낮고 천하고 어두운 자리에서 일어나 높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언제나 내미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의 손을 잡으면 됩니다. 지금까지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시23:4). 비천함의 상태와 정도는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시고 건져 주십니다. 우리를 가장 비천한 죄와 지옥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져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본문 24절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대적들로부터 자유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과 이스라엘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70년의 포로에서 해방은 꿈꾸는 것 같은 것입니다(시126). 기쁘고 즐겁고 웃음과 찬양이 가득합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큰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작품이 아닌 하나님의 명품입니다. 누구에게나 대적이 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대적이 3,000명이나 있었고 사도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40여명이나 있었습니다. 전문적인 살인단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인단이 아님을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삶의 이유라면 이미 불행한 것이고 저주 받은 것이고 사탄과 마귀에게 예속된 하나님께 버려진 존재들입니다. 생명을 일으키고 살리는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파멸시키려는 사탄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께 평생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대적은 시대에 따라서 애굽, 아모리, 아말렉,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 앗수르, 바벨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대적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입니다(벧전5:8). 영적 안목으로 보면 훨씬 무수합니다. 때로는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수도 있습니다(마10:36). 위장된 친구와 원수도 많습니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의 대표적 소설인 「파리 대왕」에는 세상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천사 같은 어린이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 모두 천진난만하고 자기 것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무인도는 유토피아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파당을 짓고 적대 관계가 되어 갔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았는데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다가 급기야는 폭행과 살인마저 저지르게 됩니다. 천사 같았던 아이들이 결국에는 추악한 괴물이 되어 간다는 내용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성이 악함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타락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경외하지 않으며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왕이 되고 만물의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탐욕스러운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교만, 태만, 음란, 아집, 질투, 포학, 거짓과 같은 온갖 죄악을 자행합니다. 그 여정의 끝은 사망입니다. 이러한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절망한 인간에게 구원의 유일한 방편이 되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로 그분께 나아가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적 마귀는 때로는 박해와 때로는 부드러운 유혹으로 성도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강하게 흔듭니다. 가까운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을 대리자로 내세워 분열과 싸움을 일으킵니다. 악령인지 성령의 역사인지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교묘하게 접근을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경험과 능력으로는 알 수도 없고 물리칠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수많은 악하고 강한 대적으로부터 지금까지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의 남은 생애도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음성에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 승리와 감사와 사명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먹을 것을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본문 25~26절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의 히브리어 ‘칼 바사르’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가르킵니다. 이스라엘 사람 뿐 아니라 온 인류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물질들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땅 위에서 생명을 일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마5:45). ‘먹을 것’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모든 육체’는 사람뿐만 아니라 육축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기도문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립니다. 일용할 양식은 음식뿐 아니라 건강, 사람, 사업, 공기, 생각, 언어, 아이디어, 지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공급이 중단되면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눈과 귀와 입의 기능도 하나님이 주셔야 사용되는 것입니다. 자동이 아니고 당연이 아니라 놀라우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하나님 뜻에 합당하도록 잘 사용해야 합니다. 교만하거나 오용하거나 남용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거두어 가십니다.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고 감사만 크게 할 때 일용할 양식은 더 풍성해지고 가치가 높아집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삶의 방식을 두 가지로 정립했습니다. 하나는 존재 지향의 삶과 또 하나는 소유 지향의 삶인데 이 두 가지를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존재 지향은 인격을 지향하는 것이고 소유 지향은 시장을 지향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경쟁과 노력으로 땅에 있는 것을 소유하려는 소유지향형이 있고 또 하나는 자기 존재가 어떻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존재 지향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 지향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복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유의 복입니다. 이것은 명예와 물질과 땅에서 갖는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복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유의 복을 추구합니다. 또 하나는 인격적인 복입니다. 내 자신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고 땅에서 사는 동안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며 사는 복인데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입니다. 예수 믿고 특별히 복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받아야할 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효자가 있고 불효자가 있습니다. 효자나 불효자나 외형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효자도 부모의 모습을 닮고 불효자도 부모의 모습을 닮습니다. 또 효자나 불효자나 다 그 이름이 족보에 오릅니다. 둘 다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습니다. 그런데 불효자는 한 가지는 받지 못합니다. 마음의 감동입니다. 효자는 자기 부모를 보면서 마음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그 마음속에 부모의 은혜를 잊지 못하면서 늘 존경합니다. 그러나 불효자는 그 중심에 부모를 향한 마음의 감동이 없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효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받나' 이렇게 묻는다면 마음으로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면 은혜를 받은 자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는 특별한 은혜가 있는데 하나님께 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세상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물질을 보면 욕심이 생기고 땅의 것을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런 것은 일반적으로 모두가 갖는 본능적인 욕구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면서 그 마음이 감동을 받아 신비한 경지를 늘 체험하면서 살 때 이 사람을 가리켜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모든 일이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장사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가르침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예배도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감동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감정이나 기력(氣力) 등을 포함한 총괄적인 용어라고 합니다. 일종의 미적 ‘혼합감정’이 감동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쾌와 불쾌가 감동 때문이라고 합니다. 감동이 있으면 쾌감을 느끼고 감동이 없으면 불쾌를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를 감동이 없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17에는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아무 감동이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감동이 없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 저주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무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감동은 은혜입니다. 감동은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다면 이것이 곧 은혜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동합시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소유적인 사람이 아니라 존재적인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면 풍성하고 행복하고 하늘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늘의 하나님께 감동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열매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비천한 우리를 기억하시고 대적에게서 건져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는 하늘의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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