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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Worship broadcastof Bundong church

등록일 : 2019.07.19   조회수 : 747   설교본문 : (누가복음 15 : 11 - 32)

낭비하는 인생

  어린아이가 스승이 될 때가 있습니다. 노인이 스승이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스승이 될 때가 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 세차게 부는 바람, 추운 겨울, 따뜻한 햇빛, 자연의 질서가 스승이 될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류의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중국 고대 송나라 때 재상인 마지절은 서화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그는 그림을 수집하여 감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당나라 때 이름난 화가였던 대주의 작품 ‘투우’를 좋아했는데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그림에 습기가 찰까 봐 틈만 나면 마루에 펴놓고 말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농부가 소작료를 바치러 왔다가 먼 발치에서 그 그림을 보고 피식 웃었습니다. 이를 본 마지절이 농부에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이 그림은 당나라 대가인 대주의 작품이다.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웃는 것이냐?” 그러자 농부는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저 같은 농사만 하는 농부가 뭘 알겠습니까? 다만 저는 소를 많이 키워봤기 때문에 이상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마지절은 궁금해서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냐?” 농부는 마지절에게 대답했습니다. “소는 싸울 때 뿔로 상대편을 받으며 공격하지만 꼬리는 바싹 당겨서 사타구니에 끼웁니다. 힘센 청년이라도 그 꼬리를 끄집어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소들은 싸우면서 꼬리를 치켜 올라가 있으니 말이 되지 않아 웃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마지절은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대주는 이름난 화가이지만 소에 대해서는 너무도 몰랐구나. 이 그림을 애지중지한 내가 부끄럽다.” 때론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지식보다 살면서 체득한 지혜로 상황을 대처할 때 좋은 결과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백발 어르신의 한숨과 한평생 농사를 지어온 농부의 갈라진 손들은 가까이 있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언제나 겸손하게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동서고금에 이 탕자의 비유만큼 기독교의 진리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계신 곳으로 더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과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의 비유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잃어버린 하나를 끝까지 찾는 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며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맞아주는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감동 깊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무엇인가를 쓰고 사용하고 낭비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사용했느냐는 무엇을 남겼느냐보다 더 중요합니다. 바로 쓴 것이 진정한 재산입니다. 낭비하는 인생의 모습을 살펴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탕자의 재물 낭비

  본문 13-14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은 신명기 21장 17절에 의하면 전 재산의 3분의 1을 얻게 되고 장자가 3분의 2를 차지합니다. 재산의 분배는 부친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하는 법이고 생전에 주는 것은 선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친 생전에 재산을 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로 할 수 없고 오직 부친의 은총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부모들은 생전에 자녀에게 미리 재산을 분배하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하여튼 아버지에게 재산의 분깃을 요구한 것은 아버지에게서 독립하여 자유를 얻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릇된 자유는 방종과 방탕과 타락으로 흐르고 범죄와 탈선의 기회가 됩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도 그릇된 자유를 추구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탕자는 분깃을 받아 먼 나라고 갔습니다.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재산을 몇 달이 못 되어 재산을 정리하여 먼 나라로 미련 없이 떠난 것입니다. 먼 나라는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방탕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간섭이 싫어서 떠나가는 인간성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바로 죄의 근원인 것입니다(행2:39, 엡2:13).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고(갈5:1) 하나님을 떠난 자유는 방종과 타락과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정리한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하였습니다. 방탕은 구원과는 반대되는 멸망의 길입니다. 그는 방탕으로 얻은 재산을 순식간에 탕진해 버렸습니다. 쉽게 얻은 재물은 또한 쉽게 잃는 법입니다. 땀이나 노력이나 가치를 모르는 재산은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불행은 겹쳐 오는 수가 많습니다. 불행은 여러 가지 아픔과 고통을 몰고 옵니다. 이 겹친 불행에 둘째 아들은 비로소 궁핍을 체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돼지를 치는 돼지만도 못한 인생으로 추락하였습니다. 쥐엄 열매도 못 먹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끝없이 주님을 쥐엄 열매인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추악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방탕할 때 친구들은 모두 떠났고 그 많은 아버지의 재산은 탕진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그 때에 둘째 아들은 탕자가 되었고 친구와 재물과 신분과 모든 좋은 것을 다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던 중 한 여관에 머물렀습니다. 여관 주인은 목사님에게 가정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은 주방에서 냄비를 닦던 소녀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고 싶다며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매일 ‘주님, 저 자신을 보여 주세요.’라고 기도를 해 보렴.” 소녀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며칠 후 목사님이 여관을 다시 찾았을 때에 주인은 소녀가 밤낮없이 울기만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소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오늘은 기도를 한 가지 더 가르쳐 줄테니 이제부터 매일 ‘주님, 제게 주님을 보여 주세요.’라고 기도해 보렴.” 소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몇 년 후에 한 젊은 여인이 목사님을 찾아와 자신을 기억하시는지 물었습니다. 바로 그 여관의 소녀였습니다. “첫 번째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은 제 추악함을 보여 주셨고 압도적으로 큰 죄 때문에 슬픔과 두려움에 빠져 매일 그 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기도를 하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이 저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후 죄 짐이 모두 사라지고 비로소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참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알게 하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성령 충만에서 비롯합니다. 나의 능력과 세상적인 지혜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따라가는 인생이 됩시다.


  둘째 아들은 모든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궁핍하게 되었고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고 쥐엄 열매도 제대로 못 먹는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재산뿐만 아니라 시간과 정욕과 젊음을 낭비하였습니다. 우리는 낭비하고 탕진하는 허랑방탕하는 인생이 아니라 효도하고 일하고 절약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탕자적인 낭비를 점검하면서 부모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인생으로 거듭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맏아들의 분노 낭비

  본문 28-30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맏아들은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사연을 아버지께 묻지 않고 종에게 물은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을 뜻합니다. 맏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소식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기뻐하는 종보다 못했습니다. 맏아들은 집 안에 있는 탕자였습니다. 무서운 폭탄과 같았습니다. 비로소 터진 것입니다. 분노가 터졌습니다. 일시적인 분노가 아니라 마음에 오랫동안 깊이 자리잡은 꿈틀거리는 노여움이었습니다. 맏아들의 노여움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유대인의 분노적 감정을 표시합니다. 삐뚤어진 유대인의 회개를 위해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권유하신 것입니다. 율법적 신앙은 상전과 종의 관계 같은 저급한 것이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높은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명령을 지키는데만 급급하였고 그렇게 지켰다는 자만에 산 것입니다. 은혜의식이 아닌 평생 공로의식으로 교만과 분노의 지옥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천사같은 기쁨은 전혀없고 마귀같은 분노만 가득하였습니다. 내 동생이 아닌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의식이나 사랑이 전혀 없었습니다. 분노는 형제나 부자 관계를 깨뜨립니다. 분노하면 가정과 교회의 관계나 친밀성은 산산히 유리 조각처럼 깨져 버립니다. 아우에 대한 형의 악의를 폭로하였습니다. 아우를 창녀들과 함께 재산을 삼켜버린 사람이라고 정죄하고 저주하였습니다. 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욕심으로 가득한 집 안에 있는 무서운 탕자였습니다. 동생임을 거부하고 동생의 돌아옴을 불쾌해 하는 얼음 같고 칼 같은 느낌입니다. 어쩌면 평소에 이런 형의 태도에 동생이 집을 떠났을 것입니다. 동생을 집에서 몰아내고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내쫓는 강도같은 형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온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미국의 9·11 테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에 뿌리를 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테러를 뿌리 뽑기 위해 ‘충격과 공포’라고 불릴 정도의 대공습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행했습니다. 테러를 응징하는 동시에 예방한다는 명목의 공격이었지만 그 부작용을 생각하지 못한 처사일 수 있었습니다.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집이 파괴된 사람들이 원한은 품고 또 다른 자살 폭탄 테러에 자원하는 악순환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압적일수록 피해자의 가슴에는 울분이 쌓입니다. 그 분노는 폭발적이고도 끔직한 공격성과 함께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을 계속 불러오곤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일방적인 전쟁이란 없습니다. 심지어 부부 싸움도 그렇습니다. 오죽하면 ‘부부 싸움에서 이기면 배우자를 잃는다.’라는 말이 있을까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이긴 것 같아도 상대방의 마음속에 그 상처가 잠복해 있다가 사소한 일도 신경전으로 발전합니다. 무시를 당한 사람은 그 쓴 뿌리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공격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면서 점차 서로를 증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모든 관계를 승패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인 성도에게는 기도의 특권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원수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맡아들의 분노 ‘오르기조’는 콧구멍을 벌름거린다에서 온 말입니다. 일시적 격앙이 아닌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와 동생과 모든 사람들에게 분노를 뿜어 내었습니다. 맏아들의 분노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분노로 인하여 사람과 가정과 교회가 무너지고 깨어지고 불타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분노공화국입니다. 모두가 분노로 충만해져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 모든 분노를 버리고 치유 받아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와 인격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아버지의 사랑 낭비

  본문 20-24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우리가 하나님께 1m다가서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0m 가까이 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걸어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려 오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묘사하는 글입니다. 이 사랑은 회개하는 죄인을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선수적 사랑(initiative love)을 말합니다. 첫째는 아들이 아버지를 보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발견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돌아옴을 매일 고대하면서 기다린 증거입니다. 비록 아들의 모습은 변화하였지만 또 서로의 거리가 멀었으나 아버지의 사랑은 즉각적으로 아들을 알아 보았습니다. 둘째는 아들은 서서히 걸어갔으나 아버지는 달려왔고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동작에 비해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동작은 빠르고 결정적입니다. 셋째는 아들이 죄를 고백하기 전에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먼저 행동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사실로서 아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아닌 품군으로 보아 달라는 탕자를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다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노예가 아닌 아들의 권리를 회복시켰습니다. 상황에 관계없이 변함없는 신분을 인정하고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끝없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아버지는 돌아올 탕자에게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보여 주셨고 낭비하였습니다. 


  사람을 동물로 비유하여 분류하면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개형과 고양이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잘 따릅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 때문입니다. 개는 주인이 아홉 번 잘못하다가도 자신에게 잘해준 것이 한번 있으면 그 한 번의 잘해준 것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억이 개로 하여금 사람을 잘 따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아홉 번 사람이 잘 해주다가 한번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한번을 기억하고 그 기억이 사람을 잘 따르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실상은 고양이에게 개보다 더 많이 잘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사람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한 번의 사랑을 받고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번의 큰사랑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사람을 나누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과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대개는 사람들이 사랑을 기억하기보다는 상처를 기억합니다. 사랑은 금방 잃어버리면서 상처는 오래 기억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받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사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은혜를 맡은 자들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이 있고 은혜를 받은 자들이 있고 은혜를 맡은 자들이 있는데 받은 바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자는 은혜를 맡은 자입니다.


  치유받은 자의 건강한 자아선언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하나님의 보배이다.나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귀한 사람이다. 나는 큰 일할 위대한 사람이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부자다. 나는 행복하다. 남에게 베풀며 산다. 나는 멋진 인생을 살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다. 나는 천재다. 내가 세상을 변화 시킨다. 나는 건강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아멘! 아멘!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주고 또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무리 주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낭비해도 됩니다. 그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3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 향유를 쏟아 부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교회에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부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퍼붓는 거룩한 사랑의 낭비자들이 되기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가족과 교인은 모두가 각각 다릅니다. 갈등과 전쟁 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탕자처럼 재물을 낭비하지 말고 맏아들처럼 분노를 낭비하지 말고 오직 아버지처럼 사랑을 낭비하여 가정과 교회를 치유하고 살리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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