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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Worship broadcastof Bundong church

등록일 : 2019.11.29   조회수 : 2,980   설교본문 : (마가복음 10 : 35 – 45)

섬기러 오신 예수님

  회개는 정신적으로 만족을 얻기 위한 행동이나 열광적인 종교체험이 아닙니다. 험하고 먼 길이며 때로 대가 지불이 필요합니다. 죽어도 못 떠날 것만 같은 익숙한 터를 떠나는 것이며 끈적끈적한 탐욕의 맛을 끊는 것입니다. 멋지게 위장한 외식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깊은 병이 되어 버린 ‘자아 사랑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련한 죄인이 자신의 실상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며 엎드리는 것입니다. 회개는 쉽고 유익하며 좋기 때문에 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살려면 그 길밖에 없기에 힘들고 아무리 멀게 느껴지고 불가능한 것 같아도 구명줄을 잡듯이 그 길을 붙들 수밖에 없는 것이 회개입니다. 2천 년 전 오순절에 성령님이 역사하셨을 때 나타난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죄인들의 반응이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심령을 찌르니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 3천 명이 회개하며 외친 말은 다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회개할 만하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가 목숨과도 같이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진실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들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실존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제자들이 서로 자리다툼을 벌이며 시기하였던 근본적 원인은 그들의 메시아 관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수많은 권능들과 권세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던 터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였음에는 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나름대로의 상상의 메시아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할 정치적 왕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왕 되신 메시아뿐만 아니라 수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해서는 분명히 예언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통념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며 지상적인 메시아에 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여러 차례에 걸쳐 예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귀에는 그 말씀들이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적 방법에 익숙하고 길들여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도 자신의 선입견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은 잘 듣고 받아들이지만 비록 진리라 할지라도 자신의 귀에 거슬리거나 어렵고도 힘든 곤경을 감사하도록 요구하는 말씀은 흘려보내 버리기 십상인 것입니다. 우리도 일시적 명예와 세상적 보상에만 집착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신앙 목적과 태도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우리가 구하는 바를 주옵소서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본문 35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올라가시는 심각한 의도와는 달리 자기 관심

사만을 주장함으로써 예수님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바를 들어달라고 요청하는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구세주로서가 아닌 단순한 선생님이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는 신앙적 고백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내 욕심과 욕망과 탐욕으로 가득 차면 눈이 어두워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진정한 제자의 신앙이나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생활은 우리의 세상적인 욕심을 배설물처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고 채워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보고 채워주는 것입니다. 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과 이웃과 사명은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우리가 구하는 바를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이런 기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봐야지 세상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미국 사람들은 자동차 범퍼에 스티커 붙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스티커를 만들어 차에 붙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공동 운전사’(GOD IS MY CO-PILOT)라고 적힌 스티커를 부착하고 다니는 차를 본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적인 문구를 차에 붙이고 다니던 사람이 난폭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호를 무시하고 주행하다가 교통경찰에게 적발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큰 부끄러움일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는 위로와 평강은 원하면서도 그리스도인다운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생활화’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중대한 과제입니다. 거룩한 신앙의 모습이 삶 속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주일과 평일에 전혀 다른 생활을 하며 교회와 가정에서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현장 또는 일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적용해야 할까요?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고민하며 풀어 가야 할 문제입니다. 신앙은 주일에 교회 갈 때만 가슴에 달았다가 예배가 끝나면 떼어서 다음 주일까지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신앙은 곧 우리의 일상생활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 무엇이든지 달라고만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고 조릅니다.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장하면 달라고 하지 않고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채워 드립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달라고 하는 신앙에서 드리고 섬기는 신앙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채워 드리는 성숙한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우리에게 우편과 좌편을 주옵소서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본문 37절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두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해한 메시아 왕국이란 몰락한 다윗의 왕권을 회복시키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는 지상적 왕국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지상적 왕권을 예수님이 수립했을 때 권력의 2(우편)와 3(좌편)인자가 되게 해달라는 간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추측은 예루살렘이라는 왕도(王都가 언급되면서 구체적으로 가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당하는 수난과 죽음에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의 관심은 메시아적 왕권의 영광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 왕국에서의 영화를 얻는 방법은 권좌에 앉는 것에 있지 않고 도리어 고난과 죽음을 통해 권력을 포기하는 데 있습니다. 메시아 왕국에서의 영광이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의지에 따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감히 영광의 자리를 주도적 입장에서 바라거나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주어진 고난과 사명을 피하지 않고 순종과 충성만 요청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충성하는 것이 신앙이며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좌우편의 자리가 아니라 순종과 충성의 자리에 죽기까지 머물러야 합니다. 


  어느 등산가가 험한 산을 오르다 길을 잃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갑자기 눈보라까지 쳐서 이제 죽었다고 생각할 쯤 멀리서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작은 초가삼간 집이었습니다. 그는 거의 탈진 상태에서 "계십니까? 계십니까?" 그때 어떤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그는 무조건 들어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할머니가 자신을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정신이 드오?" "아,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이렇게 폐를 끼쳐서." "아니오, 더 머물다 가시오! 눈보라가 멈추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한다오" 할머니는 가난했지만 등산가에게 겨울 양식을 꺼내어 함께 며칠을 보냈습니다. 등산가는 눈보라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할머니는 등산가를 아들 대하듯 정성껏 보살펴주었습니다. "나도 자네만 한 아들이 있었다오,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이놈의 산이 문제요, 이놈의 산이 변덕이라." 등산가는 이 생명의 은인인 할머니에게 보답하기 위해 어떻게 해 드릴까 생각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을 보니 온통 구멍이 나고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 할머니 집을 따뜻하게 살 수 있도록 새로 사드려야겠구나" 그 등산가는 다름 아닌 거대 기업의 사업가 회장이었습니다. 눈보라가 끝나는 날 회장은 몰래 거액의 수표를 꺼내 봉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요?" "이제 이것으로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는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회장은 다시 그 산에 등산을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과연 따듯하게 지내고 계실까 궁금도 하고 해서 끔찍한 등산 경험이었지만 그 산으로 다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 집이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뛰어 들어가자 방안에서 부패한 냄새가 진동하고 할머니는 홀로 죽어 계셨습니다. 아마도 겨울 양식도 없고 작년에 너무 추워 동사한 듯 보였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내가 분명 그 큰돈을 드렸는데!" 그때 자신이 준 수표가 창문에 구멍 난 곳에 문풍지로 사용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뿔싸…." 그때서야 회장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할머니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드렸습니다. 그리고 깨달았답니다. 귀한 것이라도 깨닫지 못하게 되면 아무 의미가 없는 휴짓조각이구나.


  오늘 우리에게는 귀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가치를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 교회, 말씀, 가정, 가족, 성도, 직분, 사명…….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욕심과 야망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을 고귀하게 생각하며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우리가 화내는 대로 응답되는 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본문 41절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을 달라고 하는 소리를 들은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이 화를 내었다고 하였습니다. 다르기 때문이 아닌 똑같은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좌우편은 내 자리라는 생각입니다. 12명의 제자들은 모두가 지상에서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크고자 하면 섬기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종으로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생육신 하신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기 위해 왔음을 밝힘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섬겨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이 지상에 거하는 모든 자들에게서 섬김받을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으셨으나 친히 종의 신분으로 비하하셨습니다.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대속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뤼트론’이라고 하는데 본래의 뜻은 빚진 사람이 노예가 되었을 때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몸값으로 지불하는 돈이나 물질을 의미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 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이 중요하고 영원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계속적으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자신이 회개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기독교 작가이자 상담 심리학자인 래리 크랩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가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한 동료가 말했습니다. “강연하는 동안 자네에게 급한 전화가 왔었네. 자네 아들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더군.” 그 소식은 그의 심장을 도려내는 칼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차 안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음에도 아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제가 가르치고 꾸짖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주님을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의 마음에 평온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들을 만났을 때에 신기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들을 바라보는데 전날까지도 말썽만 피우던 아들에게 거룩한 마음이 부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 그의 아들은 주님께 온전히 돌아왔습니다. 주님이 그의 아들과 연합해 주심으로 아들의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이 선한 역사를 시작하실 때에 우리는 그분을 따르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누구와 연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달라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에 찾아오실 때에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삶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3년간이나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와 요한과 10명의 제자들은 지상적인 욕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이 화를 내면서 말하거나 결정하거나 행동하면 다 잘못된 것이며 저주입니다. 분노와 성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약1:20). 예수님을 만나고 섬길 때에 화와 분노는 사라지고 웃음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섬길 때에 변화된 기적이 일어납니다. 높아지고 섬김을 받으려 하면 욕심과 화만 충만해 집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섬겨야 제자가 되고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위한 아사셀 염소이며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처럼 섬김을 위해 생명을 드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우리가 구하는 것과 좌우편과 분노와 화를 다 버립시다. 이것 때문에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불행한 것입니다. 이제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섬김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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