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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Worship broadcastof Bundong church

등록일 : 2019.08.09   조회수 : 3,386   설교본문 : (마태복음 14 : 13 - 21)

예수님의 손

  사사기는 일명 ‘19금 소재’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토막 살인과 불륜을 비롯해 온갖 잔인한 폭력과 타락이 난무하던 사사시대의 행적이 고스란히 폭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사사시대에 그토록 끔찍한 타락과 패역이 곳곳에서 일어났는지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도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6). 이 말씀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거듭된 절규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조련사에 의해 잘 훈련된 동물과 야생성이 펄펄 살아있는 야수와 같은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조련사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우리 마음에 왕이신 하나님을 몰아내 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하나님은 내 복의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여전히 내 인생의 왕은 나일 뿐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가 내 인생을 잡어먹었기 때문에 “귀찮은 조련사 따위는 필요없어. 나의 왕은 나야!” 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하는 대상에서 공격당한 조련사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조롱과 멸시를 직접 감당하시고 친히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 몸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노련한 조련사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성 훈련은 조련사 되시는 하나님에 의해 내 인격이 다듬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이적 기사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잇습니다. 고조되는 박해의 위기 가운데서도 영육간의 궁핍을 채우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활동은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좇아온 무리들의 대부분은 예수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사랑을 지니지 못한 채 단순한 호기심이나 저급한 동기에서 구름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마음과 의도와 동기를 잘 알고 계셨지만 배고픔에 지쳐있는 목자 없는 무리들을 결코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 34:6)의 마음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고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롬 5:8). 본문의 기적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므로 우리는 무엇을 입고 먹을까하는 문제에 모든 관심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 모든 것을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책임져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예수님의 손은 받으시는 손이십니다

  본문 16-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빈 들과 저녁에 굶주린 군중들을 놓고 제자들은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하였으나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굶주린 군중들에 대한 책임감과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적인 말씀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준비한 그것을 업신여기지 않으시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전달해 주십니다. 문제는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믿음으로나마 준비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떡과 물고기는 어떤 아이가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보리 떡은 보리가루로만 만든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이었습니다. 물고기는 갈릴리 호수의 담수어의 일종입니다. 작고 초라하고 부서지고 쉬고 냄새나는 오병이어를 예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작고 초라한 것도 크고 감사하게 받으시는 너무나도 크시고 사랑이 충만하시고 드리는 손을 배려하시는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것을 받으신다면 최고의 가치이며 영광이며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작아도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의 손은 사랑과 배려의 따뜻한 손이십니다.


  기독교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의 저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속삭이실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가족이 <천만 달라를 드립니다>라는 쇼 프로그램에 초대 받았습니다. 스튜디오 안은 열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진행자는 흥분된 목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명이 오늘 천만 달러(약 110억 원)를 받으실 것입니다” 그 가족의 아버지가 ‘나는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이름이 불립니다. 부인은 환호성을 지르고 아이들은 박수를 칩니다. 그가 무대에 오르자 진행자가 말합니다. “한가지 조건에만 동의하면 당신은 천만 달러를 받게됩니다. 이제 불러 드리는 목록에서 딱 한가지만 선택하십시오” 그 목록을 읽기 시작합니다. “자녀를 입양 기관에 넘기라.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말라. 가족을 버리고 떠나라. 낯선 사람을 죽이라. 배우자를 배신하라.” 사회자가 말합니다. “자, 이제 선택하십시오” 이것이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입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그 본질을 잘 살펴보면 치명적 독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선택의 대가로 더 귀한 것을 잃게 됩니다. 당장 주어지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택하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하나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때에 현세적 복이라는 미끼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 때문에 주님을 버리고 떠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손이신 예수님의 손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은 기적과 능력과 사랑의 손이십니다. 우리의 시간과 몸과 마음과 물질과 재능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무시하고 경멸하고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크고 존귀하게 받으시는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드릴 수 있어서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 예수님께 드리려고 일하고 절약하고 저축하였고 예수님이 필요로 하실 바로 그 때에 막달라 마리아의 300 데나리온의 향유처럼 아낌없이 정성껏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고 초라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손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예수님의 손은 축사하시는 손이십니다

  본문 19절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백 씩 혹 오십 씩 잔디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기적을 행하기에 앞서 이적에 참여하게 될 무리들에게 먼저 순종과 질서를 요구하셨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유대 가정에 있어서 가장(家長)이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감사없이 무엇을 즐기는 자는 하나님께 강도짓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감사의 일상화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날의 축제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시며 제자들은 시중꾼이며 무리들은 잔치에 초대되어 온 손님들입니다. ‘축사하다’의 뜻인 헬라어 ‘유로게오’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먹기 전에 하는 유대인들의 공통된 기도의 내용은 ‘땅으로부터 양식을 얻게 하시는 우주만물의 왕이신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드리던 기도였습니다. 작은 것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삶입니다. 큰 것만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이 아닙니다. 크고 작고를 초월하여 범사에 감사하고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 겸손하시고 감동적입니다. 크신 예수님이 가장 작은 것을 가장 크게 감사하고 찬양하셨습니다. 


  '걸레만큼만'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걸레만큼만 깨끗했으면 좋겠네 유리창 걸레는 유리창보다 깨끗하고 마루 걸레는 마루보다 깨끗하고 똥 걸레는 똥보다 깨끗하니 똥을 만나면 똥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 마루를 만나면 마루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 유리창을 만나면 유리창보다 조금 더 깨끗한 오, 걸레만큼만, 이 세상 사는 동안에 걸레만큼만 깨끗했으면 참 좋겠네. 문득 '걸레만큼만 깨끗했으면 참 좋겠네' 하는 시가 간절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 걸레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법 없이 더러움을 닦아내되 더러움을 닦아내기 위해 늘 더러움보다는 조금 더 깨끗한 걸레 같은 사람 말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친절(親切)하려면 일곱 가지(七)를 칼(刀)로 자르듯이 끊어야 합니다. ① 숨은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잘 대하는 것 ② 마음이 담기지 않은 사무적인 태도 ③ 찡그린 얼굴을 보면 절대로 친절을 느낄 수 없습니다. ④ 뒤로 험담하면서 앞으로 친절할 수 없습니다. 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친절이 아닙니다. ⑥ 사람에 따라 차별하며 무시하는 태도 ⑦ 보상받기를 원하고 생색내고자 하는 마음. 친절이란 이 일곱 가지를 없애고(끊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걸레처럼 더러운 것을 닦아주는 친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믿고 충성한다고 하면서 더 더럽게 하고 불친절하여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를 욕 먹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있기 전에 순종과 질서가 있었던 것 같이 말씀과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종과 질서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직분과 일과 사명을 핑계로 우리가 더 더럽게 하고 거칠게 하고 불법을 저지르는 경우가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신 것처럼 우리의 손과 삶이 기도와 감사와 축복의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범사에 축사하는 손과 삶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예수님의 손은 섬기시는 손이십니다

  본문 19-21절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라고 하였습니다. 굶주린 가운데서 떡과 고기를 예수님이 먼저 먹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무리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내 입이 먼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이 먼저입니다. 내 입에 넣었으면 한 사람으로 끝나 기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나누고 섬겼을 대 다 배불리 먹고 열 두 바구니가 남은 것입니다. 나눌 때 1인분이 2만명이 먹고도  열 두 바구니가 남은 것입니다. 에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이상한 주문이나 신기한 동작이 필요치 않는 일상적인 자연스런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조각이 계속해서 불어나며 떡 덩어리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 기적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떡을 떼며’라는 이 단순한 한 마디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 뗀 떡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영적 생명을 위해 찢기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육체를 모형이라 하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손으로 떡을 떼셨습니다. 오늘도 하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의 양식을 위해서 여전히 떡을 떼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온 인류의 영적 양심이 되며 모든 죄인의 죄악을 모두 용서할 수 있는 큰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의 목적은 죄인들을 예수 믿게 하여 구원 하시기 위함입니다. 큰 기적이 있어도 믿지 못하고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보고 기적없이도 예수 믿는 기적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날에 한 석공이 무릎을 꿇고 비석을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정치인이 지나가면서 석공에게 말했습니다. “돌같이 단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기술이 나에게 있었으면 참 좋겠는데..” 그러자 석공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도 저처럼 무릎 꿇고 일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교회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릎 꿇고 일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끔 봉사를 하다가 이렇게 말하며 그만두는 분이 있습니다. “내 돈 내고 내 시간 들여 교회 일하면서 왜 상처까지 받아야 합니까?” 무릎 꿇고 일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무릎 꿇고 사역하면 상처받지 않습니다. 무릎 꿇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재주가 많고 뛰어난 특기가 있는 사람이라 해도 교만하면 사역자로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를 드러낼 욕심으로 일하기 쉽습니다. 결국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높게 생각해서 “내가 없으면 일이 될 줄 아냐?” 라며 동역자들을 위협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안됩니다. 반면 특별한 은사나 능력이 없어도 겸손하게 무릎 꿇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일이든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내가 높아지고자 하는 탐욕을 버릴 때 나를 일꾼으로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섬기는 마음과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으로 자신의 명예나 존재를 높이지 아니하고 오로지 백성을 섬기고 구원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끝까지 섬겨야 합니다. 내가 먼저가 아닌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희생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성도입니다. 섬김이 없으면 교회가 아무런 의미와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정이나 교회나 어디서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막 10:45). 섬길 때 오벙이어의 기적이 지금도 일어납니다. 섬길 때 내가 살고 가정과 교회가 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반드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손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손은 인격이고 삶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예수님의 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손은 어떠한 손이었습니까? 어떤 손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받으시고 축사하시고 섬기시는 예수님의 손을 본받아 가정과 교회와 삶의 자리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며 기적을 일으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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